알랭 바디우

프랑스의 철학자 알랭 바디우의 주저 중 한 권인 <조건들>(새물결, 2006)이 번역돼 나왔다. 또다른 주저인 <존재와 사건>과 함께 번역돼 나올 거라는 얘기는 몇 년전부터 있었지만 잊고 있던 차에 뜻밖의(?) 책이 나온 것이다. 그간에 출간되었던 몇 권의 책이 (反들뢰즈주의자로서) '들뢰즈 이후의 거장'으로 평가받는 바디우의 전모를 드러내기엔 좀 부족하다는 느낌을 가졌더랬는데, 이번엔 불식시켜줄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영미권에서 활발하게 번역/연구되고 있는 철학자이지만 바디우의 <존재와 사건>의 영역본이 작년에서야 나왔고 <조건들>의 영역본은 아직 출간되지 않았다(스페인어본 정도가 눈에 띈다). 그러니 <조건들>의 국역본 출간은 얼마간 '사건적' 의미를 가질 수 있겠다. 역자는 <윤리학>을 우리말로 옮긴 이종영씨이다(역시나 <윤리학> 번역에서의 불만을 말끔히 씻어주기를 기대한다).   

지젝의 적극적인 지지와 찬양에 고무되어 개인적으로 바디우의 책들은 (<존재와 사건>를 비롯하여) 저서와 연구서들을 다수 갖고 있지만 그의 철학을 일람할 기회도 없었도 따라서 몇 마디 덧붙일 만한 능력도 현재로선 갖고 있지 않다. 다만 길잡이가 될 만한 글 하나를 옮겨놓는 걸로 일단은 소개를 대신해두고자 한다. 바디우 전공자인 서용순 박사의 '알랭 바디우 - 진리와 주체의 철학'이란 글인데, 지난 2003년 '동국대 대학원신문'(5월호)에 게재됐던 것이다. 당시 필자는 파리 8대학 철학과 박사과정에 재학중이었고 바디우의 주저들을 번역중이라고 했다. 이후 바디우의 지도하에 학위논문을 마치고 돌아와 현재는 강의활동을 하고 있는 것으로 안다. 

 

알랭 바디우 - 진리와 주체의 철학

시대의 흐름을 거스르는 철학자(?)

긍정적이건 부정적이건, 모든 철학은 시대의 징후이다. 플라톤의 철학이 그리스 공화정 말기의 혼란과 더불어 민주정에 대한 근원적인 불신을 드러내고, 하이데거의 존재론이 20세기라는 역사적 시점의 지배적인 동력이었던 기술과 그 기술의 파괴적인 힘에 대한 불신을 드러낸 것은 모두 시대의 징후로 읽어 내려가야 마땅하다. 그렇다면 우리의 시대는 어떠한가? 우리 시대는 하이데거의 연장선상에 놓여있다고 보아야 마땅할 것이다. 요컨대 수십년 이래로 우리는 사회주의를 포함한, 인간 이성으로 수립된 모든 프로젝트를 의심하고 부정하는 시대에 살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인간에게 등을 돌린 것으로 간주된 과학에 대한 불신이라고 볼 수 있다. 서구를, 나아가서는 세계를 지배했던 큰 흐름인 합리주의는 인간을 행복으로 인도하지 못한 채, 스스로의 수명을 다하고 역사의 뒤안길로 퇴장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서양 철학에서 이러한 경향은 1980년대 이래로 지배적인 담론으로 자리 잡았다. 일찍이 리요따르는 건축술로서의 철학, 즉 시스템으로서의 철학의 종말을 선고하였고, 많은 철학자들이 플라톤 이래 철학에서 배제된 시학(詩學, poetique)의 문제로 돌아가고 있는 것이다. 마르크스주의를 비롯한 이른바 거대 담론은 해체되었고, 전통적인 철학의 영역이었던 진리의 문제는 더 이상 제기되지 않는다. 철학은 이제 시학을 비롯한 예술에 자신의 지위를 양도한 채 그 안에서 자신의 존재 근거를 발견하려 한다. 철학사는 부정되었고 이제는 플라톤에 의해 추방되었던 시인들이 그 자리를 점하고 있다. 이것이 현재 철학이 위치하고 있는 지점이라는 사실은 분명하다.

이러한 시대의 흐름을 거스르며, 철학의 시학으로의 투항에 저항하는 한 철학자가 있다. 바로 프랑스의 알랭 바디우(Alain Badiou, 1937-)이다. 그의 철학적 여정은 아주 거센 굴곡을 보여준다. 싸르트르에게 감화를 받고 있던 그의 청년 시절, 알튀세와의 만남은 그를 과학적 이론의 추종자로 만들었지만 68년 혁명이 발발하자 그는 프랑스 공산당과 68혁명의 대립에 대해 애매한 태도를 취하는 알튀세를 강하게 비판하며 그와 결별한다. 그리고는 실뱅 라자뤼스, 나타샤 미셸, 프랑수와 발메 등과 마오주의 그룹인 예난(Yenan)그룹을 결성해 프랑스 공산당에 맞서 투쟁한다.

이후 80년대에 들어 유럽에 지적 반동의 시기가 도래하자 마르크스주의를 벗어나 다른 혁명적 대안을 마련하는 시도를 행하게 되고, 그 결실은 1988년『존재와 사건』의 출간으로 나타나게 된다. 그는 수학적 존재론의 구축을 통해 철학을 복권시키고, 새로운 해방적 프로젝트를 그 존재론에 담아낸다. 오늘날 그는 흔히 포스트모던 철학의 중심지로 여겨지는 프랑스 철학의 중심을 흔드는 철학자이다. 그는 자신의 주요한 무기인 집합 이론을 바탕으로 자신만의 독특한 존재론을 구성해내고, 이를 통해 만신창이가 된 철학에 그 자리를 되돌려준다.

종말을 부정하기

우선 그의 철학을 가로지르는 큰 흐름을 살펴보자. 바디우는 모든 현대 철학의 지배적 경향인 시스템으로서의 철학의 종말이라는 페이소스에 반대한다. 그에 따르면 이른바 종말이라는 테마는 철학의 새로운 출발점이 될 수 없다. 거대 담론의 종말을 이야기하는 것은 '거대담론' 만큼이나 거창한 이야기에 다름 아니다. 철학은 존재할 수 있고 우리 시대에 그 조건이 갖추어져 있다는 것이 바디우의 주장이다.

물론 철학이 항상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철학이 근원적인 위기에 처했던 시대 역시 분명히 있었다. 철학은 항상 불연속적이었고, 철학을 가능하게 하는 '조건' 또한 다양한 방식으로 존재해왔다. 하지만 철학과 그 조건들이 가지는 관계에 놓여진 불변적인 요소가 있다면 그것은 바로 '진리'이다. 진리라는 테마만이 철학과 그 조건이 되는 여러 사유를 관계짓는 요소이다. 그런데, 이러한 철학의 조건들은 진리를 생산하는 절차(공정, procedure)로서만 철학의 조건이 된다. 말하자면 이 조건들은 각자의 개별적 특성에 기반하여 진리를 생산해내고, 진리를 생산해내는 한에서만 철학과 관계하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러한 진리 생산의 사유는 철학의 조건인 것이다. 이렇듯 철학은 스스로 진리를 만들어내지 않는다. 다만, 조건들이 생산한 진리를 개입(intervention)을 통해 명명(nomination)해낼 뿐이다. 바디우는 철학의 조건을 이루는 진리 산출의 유적1) 절차(공정, procedures generiques des verites)를 네 가지 정도로 분리해낸다. 정치, 과학(그 중에서도 수학), 사랑, 예술(시학(詩學))이 그것이다.

철학 - 봉합에서 공가능성으로

철학의 조건으로서의 네 가지 진리의 공정이 서로를 배제하거나 종속시키지 않고, 그 조건들이 모두 공존가능하다는 점을 사유하는 것이 바로 바디우가 정의하는 철학의 작업이다. 여기서 우리는 이 네가지 공정이 모두 진리를 생산하다는 점에 주목하여야 한다. 바디우는 이 점을 아주 중요시하여 봉합이라는 개념을 만들어낸다. 그 동안의 철학은 이러한 공가능성(compossibilite, 여러 가지 조건이 각자의 영역에서 모두 진리를 생산하는 가능성)을 인정하지 않았다. 말하자면 그 동안의 철학은 다른 조건들이 가지는 진리 생산의 가능성을 인정하지 않고, 그 중 하나, 혹은 일부에 대해서만 진리의 가능성을 인정한 것이다. 진리 생산의 다양한 가능 영역은 부정되고 진리는 어느 하나의 영역에 갇혀버린 것이다.

이것을 바디우는 철학의 봉합이라고 명명한다. 그는 다양한 봉합의 실례를 제시한다. 그에 따르면 19세기는 철학이 과학적 실증주의에 봉합된 시기였고, 영미권의 아카데미적 철학은 아직도 이 봉합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마르크스주의는 철학을 정치와 과학에 동시에 봉합시켰다. 이러한 이중의 봉합의 복잡한 구조를 스탈린은 철학, 혹은 변증법적 유물론이라고 부른다. 하이데거는 기술이 되어버린 과학에 반대하여 철학을 시학에 가두어버린 것으로 간주된다. 실증주의나 마르크스주의는 이미 많은 비판을 통하여 화석화된 봉합일 뿐이고, 이제는 제도적이거나 아카데미적인 봉합이지만, 하이데거를 그 축으로 하는 시학(예술)에의 봉합은 우리 시대의 지배적인 봉합 형태이고, 전혀 검토된 적이 없는 봉합이다.

철학이 과학과 정치에 봉합되어 있을 당시, 시학은 철학의 역할을 수행하였고 마침내 시인의 시대는 열린다. 그러나 여기서 바디우가 말하는 시학은 모든 시와 시인을 가리키는 것은 아니다. 그 시대는 횔더린(Holderlin)에서 파울 첼란(Paul Celan)에 이르는 시기이며, 문제가 되는 것은 진정한 사유의 모습을 보여주는 시인과 시일 뿐이다. 하이데거가 우리에게 보여주듯이, 시학이 행한 것은 시에 의한 존재의 문제에의 접근이었다. 시인들의 공헌은 대상의 범주를 해체함으로써 탈객관화(주지하듯이 객관화는 과학의 미덕이다)를 실현해낸 데 있다.

여기서 하이데거의 철학은 객관성(대상성, l'objectivite)의 철학에 대한 비판과 객관적 철학의 시학적 해체를 결합시켜냄으로써 엄청난 강점을 획득한다. 그러나 하이데거는 수학과 시학의 이율배반을 지식과 진리의 대립, 혹은 '주체/대상'과 '존재(Etre)'의 대립으로 엮어냄으로써 문제의 본질을 호도하고 있다. 그러나 랭보, 혹은 로트레아몽의 예에서 볼 수 있듯이, 시학은 항상 수학과 사유를 공유하고 있음을 의식하고 있었다. 시인들은 수학에 대상이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이렇듯 대상의 범주를 해체하고 첼란에 이르러 시인의 시대는 막을 내린다. 그리고 철학이 완전한 탈봉합으로 나아갈 수 있는 가능성은 시인의 시대가 끝남과 더불어 열리게 된다.

진리의 사건들

우리는 이제 진리가 어떻게 생산되는가를 살펴볼 수 있다. 앞서 말했듯 진리는 진리 생산의 네 가지 절차 속에서 생산된다. 그러나, 이 네 가지 절차가 항상 진리를 생산해내는 것은 아니다. 진리는 사건을 통해서만 나타난다. 요컨대 진리의 네 가지 공정은 진리의 생산이 가능한 영역일 뿐이다. 진리는 사건에 의존적이다. 바디우가 말하는 진리는 사건의 진리인 것이고, 만일 이 네 가지 영역 속에 사건이 없다면 우리는 그 속에서 아무런 진리도 발견해낼 수 없다. 이 사건의 진리야말로 바디우 철학의 핵심이다. 우리는 각각의 절차에서 드러난 상이한 사건들을 볼 수 있다.

역사를 살펴볼 때 정치에서의 사건은 언제나 상이한 형태(18세기말에 일어난 프랑스 혁명과 20세기 초에 일어난 러시아 혁명의 형태는 동일한 것이 아니다)로 나타났다. 우리 시대에 국한시켜 보자면 정치적 사건은 68년에서 80년에 이르는 역사적 시기에 집중되어 있는데, 그 예로는 프랑스의 68년 오월 혁명과 중국의 문화 혁명, 이란 혁명, 그리고 폴란드 연대 노조에 의해 주도된 노동운동을 들 수 있다. 이 사건들은 새로운 명명이 필요한 사건들이다. 폴란드의 노동 운동을 제외하면 그들 정치적 사건은 그 내용의 새로움과는 유리된 낡은 사상 체계에 의해 표현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문화 혁명은 마르크스-레닌주의를 표방하고 있었으며, 이란 혁명은 이슬람으로의 복귀, 즉 옛 것으로의 복귀라는 형태를 띠고 있었다. 이 사건을 명명하는 철학적 개입(intervention)은 아직 완수되지 않았다. 이 정치적 사건은 우리가 동원할 수 있는 지식 체계를 교란시키는 것이기에 사건이고, 진리를 생산할 수 있지만, 그것의 명명은 아직 철학의 과제로 남아있는 것이다.

칸토르에서 폴 코헨까지의 현대 집합 이론은 수학에서의 사건이다. 이 집합 이론은 식별 불가능한 다수성(multiplicite indiscernable)에 대한 개념을 수립해낸다. 이로써 집합 이론은 존재-로서의-존재(Etre-en-tant-qu'etre)에 대한 합리적 사유와 언어 사이의 문제를 해결한다. 식별 불가능한 다수성의 존재를 증명함으로써, 기존의 지식 체계를 규정하는 언어 체계를 벗어난, 즉 기존의 언어로 규정할 수 없는 존재가 있음이 드러난 것이다. 바로 진리가 이러한 존재 형태를 갖는다고 바디우는 역설한다.

진리는 지식에 구멍을 내는 것이며, 따라서 진리에 대한 지식은 있을 수 없다. 진리는 단지 생산될 뿐이다. 그러므로 진리는 유적(類的, 산출적, generique)이며, 기존 언어를 통한 지칭에서 벗어나 있는 것이다. 진리는 항상 기존 언어에서 벗어나 있는 부분이다. 이러한 부분은 언어로 결정할 수 없는 부분으로서 기존의 언어에 비추어 초과분(exces)이 된다. 우리는 그것의 확실한 정체를 알 수 없다. 바디우는『존재와 사건』에서 집합 이론을 통해 이 사실을 잘 증명해내는데 이는 '방황하는 초과분'의 존재를 증명해내는 것이고 그 자체로 진리가 존재하는 방식이 된다.

시인의 시대를 통틀어 볼 때, 시에서의 사건은 파울 첼란의 작품이다. 데리다나 가다머 혹은 라꾸-라바르뜨(이들은 바디우의 철학적 대화 상대자이면서 동시에 그의 주요한 논적이다)와 달리 바디우는 첼란의 시에서 시는 그 자체로 충분치 않다는 고백을 읽어낸다. 그의 시는 봉합에서 벗어나기를 바라고, 시의 권위에서 자유로워진 철학을 원한다. 말하자면, 첼란은 그의 작품을 통하여 우리시대의 개념적 전유를 다른 영역과 공유하기를 원하는 것이다. 첼란의 공헌은 시를 철학이 그 시대에 행해온 사변적 기생으로부터 해방시키며, 시를 진리의 나머지 절차들과 공존하게 함으로써 시에게 자신의 자리를 돌려주는 데 있다. 이것이 첼란이 행한 시의 사건의 핵심적 내용이다.

사랑의 사건은 라깡의 저작이다. 사랑에 대한 라깡의 이론은 하나(l'Un, the One)의 지배를 파괴하고 둘(le Deux, the Two)의 문제를 사고했다는 점에서 사건이다. 라깡은 성에서의 둘을 논리적으로 연역해낸다. 이로써 남성(손상된 전체(Tout)의 벡터)과 여성(비-전체(pas-toute))은 서로 전혀 다른 둘이라는 사실이 밝혀진다. 두 개의 성은 전혀 다른 입장으로 서로 분리되어 있는 것이다. 만남이라는 사랑의 사건을 통해 둘은 일자(하나, l'Un)의 법칙을 초과하는(넘어서는) 끝없고 완성될 수 없는 경험을 꾸며낸다. 이것을 바디우는 성차에 대한 진리, 사랑에 빠진 당사자들의 지식에서 벗어나 있는 진리가, 이름없는 혹은 유적인 다수성으로서 도래하는 것으로 파악한다. 사랑이란 만남이라는 사건을 통한 '둘'에 대한 진리의 생산인 것이다.

그렇게 사건을 계기로 생산되어 잠시 나타난(presenter) 진리는 지식을 통하여 사후적(事後的)으로 표상될(representer) 뿐이다. 이때 진리를 생산해 낸 각각의 절차는 스스로 그것이 진리인지 말할 수 없다. 그들은 고유한 활동에 전념할 뿐, 진리에 무관심할 수밖에 없다. 그 절차들은 진리를 모른다. 그 진리의 명명작업을 해내는 것, 그렇게 다른 곳에서 생산된 진리를 사유하는 것, 바로 그것이 철학의 작업이다. 예컨대, 철학은 이미 다른 지점에서 생산된 진리에 대해 사유하는 것이 철학의 임무인 것이다. 이제 철학은 본연의 위치로 돌아갈 수 있다. 네가지 유적 절차들에서 생산된 진리를 사유하고 명명함으로써 바디우가 원하는 철학적 행동(acte philosophique)은 이제 가능해진 것이다.

주체의 이론

위의 예에서 보았듯 사건은 진리를 생산해냄으로써 지식(savoir)의 망을 교란시키고(구멍을 내는 것이다), 곧 지식 속으로 사라진다. 진리의 흔적은 그 진리에 충실한 주체(sujets fideles)를 통해서 밖에는 파악되지 않는다. 그런 점에서 주체는 진리의 담지자라고 볼 수도 있다. (하지만 모든 존재가 주체인 것은 아니듯, 주체는 그 충실성을 잃고 배반으로 나아갈 수도 있다. 예를 들어 프랑스의 68년 오월 혁명의 많은 주체들은 그 사건이 생산해낸 진리에의 충실성을 잃고 그 진리를 배반하였고, 중국의 문화 혁명도 같은 길을 걸었다. 때로는 환영(simulacre)을 사건으로 착각하여 그 환영에 충실하기도 하는데, 파시즘의 예가 그 좋은 예이다.) 진리에 의해 호출된 그들은 진리에 충실한 주체들이다. 그 진리에 충실함으로써만 그들은 주체일 수 있고 그런 의미에서 주체들은 진리의 담지자이다. 바로 이 지점에서 바디우의 윤리학이 드러난다.

바디우는 구조주의에 의해 부정된 주체를 다시 철학의 영역으로 끌어들임으로써 객관주의를 벗어나 비로소 주체적 정치(politique subjective)를 가능하게 한다. 구조주의에 의해 단지 구조의 담지자로만 파악되었던 인간은 바디우의 손에서 다시 주체가 된다. 물론 이 주체는 마르크스주의의 프롤레타리아와 같은 선험적인 주체는 아니다. 자신의 이해(intert)에 의해 움직이는 인간 동물(l'animal humain, 영장류 동물로서의 인간)은 진리의 사건을 만났을 때 비로소 자신의 이해에서 벗어난 이해(intert-desinteresse)를 추구하는 주체가 되어 자신의 진리에 충실하게 된다. 이렇게 사건을 통하여 동물이었던 인간은 존재의 새로운 방식을 스스로 결정함으로써 마침내 주체가 되는 것이다. 그 새로운 존재방식을 바디우는 충실성(fidelite)이라고 부른다.

이 주체의 충실성이야말로 진리의 과정이 지속될 수 있게 하는 단 하나의 원칙이다. 진리는 사건과 동시에 나타나 지식 체계에 파열구를 만든 후 즉시 지식 속으로 사라진다. 결국 진리가 존재했고 존재하고 있음을 알 수 있는 것은 지식의 객관성이 아닌 진리가 만들어내는 주체성, 바디우에 의해 충실성으로 표현된 그 주체성의 발현을 통해서일 뿐이다. 주체의 충실성은 진리의 존재를 지속적으로 확인할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다.

오늘날 미디어와 정치 이데올로그들에 의해 유포된 '인권'과 같은 세론(世論)은 결코 윤리학의 지표가 될 수 없다(우리는 이 '인권'이 미국의 주요한 공갈 협박 수단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다). 오로지 진리의 변전만이 윤리학의 재구성을 위한 기준일 것이다. 그 윤리학의 금언은 "계속하자!(continuer!)"라고 말한다. 즉 진리에 계속 충실하기를 요구하는 것이다. 여기에 바로 이른바 진리의 윤리학의 함의가 있다. 다시 말해 바디우의 윤리학은 진리가 자신을 드러내는 방식인 '주체의 충실성'에 의존하고 있는 것이다.

주지하듯 바디우의 이론에서 주체는 지식의 영역인 객관성의 범주에 포섭될 수 없다. 이러한 관점은 전통적인 마르크스주의가 견지해왔던 주체에 대한 과학적-객관적 문제틀에 정면으로 대립한다. 마르크스주의는 계급이라는 객관적인 개념을 통해, 혁명적 주체성을 지녔다고 전제된 프롤레타리아 계급을 보편성을 지닌 역사의 주체로 설정한다. 계급은 이로써 주체성과 객관성을 아우르는 순환적인 개념이 된다.

하지만 바디우에게 주체는 객관적인 수준으로 포섭될 수 없는 것이다. 객관적으로 파악된 인간, 대상성을 통해 인식할 수 있는 인간은 그저 인간 동물일 뿐이고, 주체는 이 인간 동물에 '무엇'인가가 추가된(supplemente) 것이다. 그 '무엇'은 진리에 다름 아니고, 이 진리를 통하여 인간 동물은 주체가 된다. 주체는 결코 선험적으로 설정될 수 없고, 인간이 사건을 만나지 못한다면, 그리고 그 사건을 통해 드러난 진리를 만나지 못한다면, 주체는 나타나지 않는다. 이는 바디우의 철학에서 직접적으로 도출되는 결론이다.

우리는 앞서 바디우에게 진리는 기존의 지식망을 교란시키는 것이라고 말한 바 있다. 기존의 지식 체계는 객관성의 표현에 다름 아니라고 할 때, 진리는 객관성의 범주에 포함될 수 없다. 객관적인 것은 지식 체계일 뿐이다. 물론 진리는 오직 한 순간 빛을 발하고 지식 속으로 사라지지만, 그 진리에 충실한 주체들을 만들어낸다는 점에서 진리의 사건은 주체화 과정(le processus de subjectivation)이라고 말할 수 있다.

새롭게 열리는 진리의 지평

지금까지 살펴본 바디우의 철학을 통해 우리는 그가 진리의 문제에 천착해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진리는 우리가 알고있던 진리와는 사뭇 그 모습이 다르다. 그것은 다수의 진리로서 전혀 다른 진리의 지평을 인정하는, 결코 폭압적이지 않은 열려있는 진리이다. 진리의 공가능성(compossibilite)은 전제적인 일자(一者, l'Un)의 모습을 부정하고 진리의 다수성을 인정한다.

이러한 바디우의 철학은 우리로 하여금 복수의 진리를 서로 다른 영역에서 사고하게 하며, 잃어버렸던 주체를 새로운 방식으로 전유할 수 있게 한다. 바디우와 더불어 합리적 사유는 마침내 가능해지고, 그것이 포함하는 혁명적 사유는 마침내 펼쳐질 수 있게 된 것이다. 결국 그는 시대의 흐름을 거스르는 철학자가 아닌, 새로운 사고의 지평을 열어 젖히는, 진리의 옹호자인 셈이다. 바디우와 더불어 서로를 인정하는 다수의 진리라는 관념이 수립되고, 진리라는 관념이 편협한 사고로 우리를 인도할 가능성은 제거된다. 마침내 열려진 지평 위에서 진리를 사고하는 일만이 우리를 기다리는 것이다.(서용순/ 파리 8대학 철학과 박사과정)

주1) 유적(類的)이라고 번역할 수 있는 generique라는 말은 논리학적으로 비결정성을 가리킨다. 다시 말해 하나의 개별 원소가 '유적'일 때 우리는 그 원소가 어떠한 구분에 속하는 것인가만을 알 뿐 동일한 구분에 속해있는 다른 개별 원소와 어떻게 구분되는지는 알 수 없다. 그 개별 원소는 항상 개별적이면서 일반적인 가치를 갖는다. 진리의 서로 다른 절차들은 진리를 생산하는 동일한 구분에 속해 있지만 서로의 관계는 규정지어지지 않는다. 그 절차들은 각각의 진리를 생산하지만 서로 분리되어 있다는 점에서 유적이다.

06. 10. 20.

by 크롯 | 2009/11/29 15:44 | 스터디 자료 | 트랙백 | 덧글(0)

2009 청어람 아카데미

2009/09/29 11:06:50
'종교개혁사상 강좌 듣고, 사회적 글쓰기 하자'

청어람아카데미 10월 5일 개강

‘한국교회와 한국사회를 위한 인재발전소’를 자임하는 청어람아카데미 가을강좌가 오는 10월 5일부터 열린다. 이번 학기에는 총9개 강좌가 개최된다.

‘미완의 기획, 종교개혁’은 총 6회에 걸쳐 종교개혁사상을 폭넓게 조명하는 대중강좌이다.

르네상스 시대 천재화가였던 카라바조(Caravaggio)의 작품세계를 통해 중세를 넘어 종교개혁에 이르는 새로운 ‘개신교적 의식’의 탄생을 조명하는 김상근 교수(연세대 신학과)의 강의로 시작하여, 중세교회에 대한 개혁자들의 저항(protest)이 단순히 종교적 개혁만 아니라, 서구사회 전반에 근대민주주의적 착상이 진전되는 데에 결정적 역할을 했음을 헌법학자인 이국운 교수(한동대 법학부)를 통해 듣기도 한다.

에라스무스(Erasmus), 루터(Luther), 칼빈(Calvin) 등 주요한 종교개혁자들의 핵심적 면모를 강영안(서강대 철학과), 김주한(한신대 신학과), 박경수(장신대 역사신학) 등 해당 분야 국내 전문가들을 통해 제시함으로써 한국 개신교가 현재 처한 위기상황을 종교개혁 시대에 비추어볼 수 있는 흔치 않은 기회를 제공한다. 마지막 시간에는 강연자들이 다 참여하는 종합토론을 통해 오늘날 한국 상황에 필요한 실천적 적용도 모색한다.

‘사회적 글쓰기’ 강좌는 최근 사회적으로 트위터, 블로그, 클럽, 카페 등에서 이루어지는 ‘온라인 글쓰기’와 시나리오 작가, 소설가 지망생이 늘고 있다는 ‘오프라인 글쓰기’에 대한 관심에 부응하는 6주간의 글쓰기 교실이다.

‘사적인 글쓰기’ 수준을 넘어서 대중들에게 노출되는 글을 쓰기 위해 알아야 할 글쓰기의 노하우, 다양한 매체환경이 어떤 글쓰기를 요청하는지에 대한 체험적 지침, 지속적인 글쓰기가 어떻게 출판으로 이어질 수 있는지 등등을 해당 분야의 대표적 논객들인 진중권, 고재열, 김기현 등을 통해 직접 들을 수 있는 절호의 기회이다. 이 강좌는 기간 내내 수강생들이 직접 글을 쓰고, 사진과 동영상을 찍고, 온라인에 올려보는 워크숍과 더불어 진행된다.

이 외에도 사람들의 눈길을 끄는 다양한 강좌들이 이어진다. ‘창조계급 시대, 문화도시의 부상’은 현재 전세계적 문화정책의 핵심 트렌드를 현장에서 연구하고 있는 전공자가 소개하는 4주간의 과정으로 문화정책, 문화이론 등에 관심 있는 이들이 놓치지 말아야 할 기회이다.

청어람아카데미의 강점인 문화예술 분야의 다양한 강좌들은 더 세분화되고, 다양화됐다.

‘기독교 문화관’(박준용/ 한양대 강사), ‘영화가 꿈꾼 세상’(최은/ 종교중앙대 강사), ‘영화 글쓰기’(이창우/영화평론가), ‘현대미술의 도전’(백기영/경기창작센터 학예팀장) 등의 강좌가 8주간 펼쳐지고, ‘<그리스도와 문화> 다시 읽기’, ‘영화 해석공동체’ 등의 세미나와 워크숍 등이 함께 진행된다.

문의/02-319-5600

by 크롯 | 2009/10/11 11:54 | 백기영 기고 | 트랙백 | 덧글(0)

미술-사람을 보다 전

봉산문화회관은 개관 5주년을 기념해 7일부터 18일까지 제1~3전시실에서 '미술-사람을 보다' 전시를 갖고 있다. 이번 전시는 설치미술과 영상, 회화를 포함한 동시대 미술가(시각적 몰입의 힘을 가진)와 사람과의 만남에 주목한다. '미술을 보면 사람을 바라보는 미술가가 보인다'를 전시의 시점으로 설정했다. 지금까지 세계와 공간의 해석을 중시하던 미술가에게 미술에 대한 근본적인 해석을 질문하면서 미술과 사람 사이의 관계 해석을 중요한 주제로 삼는다.

멀티디스플레이 미디어 영상을 선보이는 류재하 작가는 아름다움 또는 장식성에 관한 인간의 기본적인 감성과 욕구를 탐구하고, 이를 전통미(美)와의 연대 속에서 재구성한다. 안양공공예술프로젝트(2005), 광주대인시장프로젝트(2008) 등에서 공공성이 다분한 사회연구 프로젝트를 진행해온 백기영 작가는 사람의 몸에 영양분을 공급하는 먹을거리에 관한 연구를 진행하고 있다.

임창민 작가는 비디오 미디어로
인간 욕망의 구조를 다양하게 조명한다. 작가의 주제는 사람이다. 도시철거현장의 비디오와 일상생활의 현장 사운드(Sound)를 미묘하게 합성한 '철거된 기억들' 작업은 사람이 살아가는 진행형의 장소와 그 기억에 대하여 우리 스스로에게 질문하고 있다.

정병국 작가는 '낯선 장소에 만난 원초적 침묵의 몸뚱이' 혹은 '불확정적인 실존의 공포와 전율' 등 영화 스크린의 한 장면 같은 회화 이미지를 창출해낸다. 대체적인 예술창조가 자아와 대상의 대면에서 시작된다면 작가가 대면한 대상은 인간이다.

새로운 테크놀로지 매체와 그 문화를 적극적으로 수용하는 하광석 작가는 복합적이고 유기적인 관객 소통의 메시지를 지향한다. 허양구 작가는 인간의 한계, 특히 심리적 공허함을 이미지화하는데 주력한다. 작가는 주로 얼굴 표정에서 공허감을 착안할 수 있도록 이미지를 설계하며, 작가 주변의 생활인을 모델로 하여 현실감을 담아내고 있다. (053)661-3081

◇시민참여 감상 프로그램

 

7∼18일
오후 6시

8일
오전 10시

10일
오후 4시

13일
오후 2시

14일
오후 2시

16일
오후 2시

작 가

백기영

정병국

하광석

허양구

류재하

임창민

내 용

"동시대 예술에서  생태학적 상상에 대하여"

"사람과 인간"

창작 과정

창작 과정 

"미술과 사회"

창작 과정

장 소

스페이스 라온

제1전시실

제3전시실

제1전시실

제2전시실

제3전시실

          ※백기영 작가 전시기간 중 '과일 및 채소 맛보기' 퍼포먼스 진행


2009-10-08 08:00:19 입력

by 크롯 | 2009/10/11 11:51 | 주요전시 정보 | 트랙백 | 덧글(0)

리트머스 아카데미 위

2009년 CACS WE[Wi:] 리트머스 아카데미 1기 참여자 모집공고

   

■ WE 리트머스 아카데미 프로그램 소개

‘WE’는 안산 원곡동에 위치한 커뮤니티 스페이스 리트머스에서 올해 처음으로 시작되는 문화예술교육 아카데미로 아시아의 다양한 문화와 삶이 공존하는 원곡동의 지역성을 바탕으로 동시대예술 영역의 다양한 가치지향점을 실험하고 연구하는 프로젝트형 프로그램입니다. 로컬과 글로벌의 동시대예술 동향을 분석하며 시각예술, 건축, 디자인, 도시학, 미디어론, 큐레이팅, 연극, 무용 등 각 장르간의 크로스 오버 연구, 세계화 체제 속에서 동시대예술의 전망 등에 대해 다양한 워크숍과 콜로키움을 진행하게 될 것입니다. 이러한 교류장치를 통해 생산된 유무형의 가치들을 작가 스스로의 프로젝트로 완성해 나가는 방식의 프로그램인 WE 리트머스 아카데미에 많은 관심과 참여를 부탁드립니다.  

프로젝트 진행 일정

-상반기 2009년 6, 7, 8월 (3개월) 매주 토, 일요일 오후 2시~5시

-하반기 2009년 9, 10, 11월 (3개월) 매주 토, 일요일 오후 2시~5시  

프로젝트 진행 내용

WE 프로그램은 크게 나누어 스튜디오방식으로 운영되는 프로젝트형 수업과 외부강사를 초청하여 진행하는 특강 워크숍으로 구성되어 있다.

*독립 워크숍

담당 작가: 유승덕, 백기영, 김월식(3인의 강사가 매주 번갈아 가면서 진행)

*특강 워크숍 (주 1회)

① 창작과 문화 정치학_백기영_작가, 독립기획자

② 공공영역에서의 Art & context_김월식_작가

③ 미디어 아트 & 미디어 컨텐츠_장지아_미디어 아티스트

④ 인터랙티브 미디어_고창선_미디어 아티스트

⑤ 이미지 읽기와 쓰기_김종길_경기도 미술관 큐레이터

⑥ 전시 전략과 쟁점 만들기_신현진_전 쌈지 큐레이터, 현 사무소 전시팀장

⑦ 미디어로써의 몸1_김남수_공연 평론가, 백남준 미술관 큐레이터

⑧ 미디어로써의 몸2_이철성_극단 꽃 대표, 다원예술전문 기획자

⑨ 사운드 아트_김영은_작가, 한국예술종합학교 강사

⑩ 보이스 & 무브먼트_김진영_보이스 씨어터 MOM 대표

⑪ 소수의 성과 문화_임해수_트랜스 젠더 작가

WE 2009년 주요 연계 프로젝트 및 프로그램

WE 리트머스아카데미는 2009년도 커뮤니티 스페이스 리트머스에서 진행될 프로젝트들과 결합하여 현장에서 벌어지는 다양한 형태의 문화예술 프로그램에 WE작가들이 직간접적으로 참여하는 기회를 제공할 것이다.

* Air Litmus (커뮤니티 스페이스 리트머스 국제레지던시 프로그램,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지원 사업)

* 원곡동 다문화 축제 (욜라 뽕따이, 경기문화재단 지역축제 지원 사업)

* 원곡동 클럽데이 (문화관광부 다문화 지원 사업)

* 네팔 골리마을, 베시마을 프로젝트 (경기문화재단 국제교류 지원 사업)

* 기획전시1: 예술을 파는 가게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지원 사업)

* 기획전시2: 투잡스, 두 번째 직업이 예술이 되었을 때 (경기문화재단 지원 사업)

 

대상: 작가를 지향하는 모든 사람들  

모집인원: 20명  

제출서류:

1.참가신청서(리트머스 홈페이지 공지사항 또는 카페에서 다운로드)

URL- http://www.litmus.cc/ CAFE- http://cafe.naver.com/litmuscc.cafe)

2. 연구계획서(WE에 들어와서 실행하고 싶은 작업계획을 자유로운 형식으로 기술)  

접수기간: 2009년 5월 14일~5월 26일  

접수: 참가신청서와 연구계획서는 E-mail로만 접수(kuger@naver.com)  

참가비용 (한 학기당 10만원)

프로젝트 전 과정의 워크숍과 콜로키움에 결석 없이 참여한 참가자에게는 프로젝트 참가비용을 전액 환급해 드립니다.  

면접장소: 커뮤니티 스페이스 리트머스(홈페이지 약도 참조)  

면접일시: 2009년 5월 30일 오후 2시(토요일)  

전형방법:

포트폴리오를 통한 면접 (면접위원은 커뮤니티 스페이스 리트머스의 상임위원과 위촉된 외부 심사 위원으로 구성)  

합격자 발표 (개별통보)  

문의

Tel. 031_494_4595 (H)010_2728_9025 / e-mail: kuger@naver.com

담당자: 이기언 (리트머스 큐레이터)

리트머스: (425-846)경기도 안산시 단원구 원곡동 786

 

CACS WE[Wi:] (리트머스 아카데미 프로그램) 설립 기본계획                               

김월식  

 

CACS WE[Wi:] 심볼을 통한 프로그램 해석

Work & Education, West & East, Will ablE,胃, 緯,   

WE(위)는 나를 포함해서 그 의미를 연대할 수 있는 모든 사람들의 교육예술 커뮤니티이다. 또한 동과 서의 다양한 문화, 좌와 우의 다른 지향점들이 충돌하며 생산되어지는 지점과 경계의 이름이다. WE는 胃의 태생적 환경처럼 일시적이고 임시적인 정거장(station)의 역할을 수행하며 여러 움직임(activity)과 운동(movement)을 통하여 발생하는 의미들을 다시금 나누거나 쪼개어 반죽하고 합치는 platform이다. WE는 하거나 해나가는 과정에서 내일을 스스로의 의지로 결정할 수 있는 잠재태와 가능태의 모형(will able)이며 등위를 공란으로 지워버린 새로운 가치의 영역(位)이다. WE는 다른 세계 다른 층위의 어떤 것(位)들과의 소통을 위한 굿판이며 이 모든 것들을 WE라고 총칭한다.

 

WE의 목적과 역할  

○ Trans Culture

WE는 한국의 작가와 동시대 여러 나라와 민족의 예술가, 블런티어 교육자들이 문화 예술 간의 대화를 통해서 서로의 차이를 이해하고, 다문화적인 동시대 영역 속 문화와 예술, 교육 매개자로서의 역할을 주체적으로 수행해 나갈 수 있는 만남의 장이다. 구성원들의 문화적 기억을 동시대가 지향하는 다가치적 예술관에 접속시켜 오늘날 자본의 흡입력 가운데 단선화 되어가는 문화에 대한 다르게 바라보기를 실험한다. 이는 차이에 대한 감수성, 탈근대의 잡종성, 대화적 상상력 같은 개념을 원용하여 한국사회의 문화 예술, 교육적 특수성과 동서양 각국 그들의 특수성과의 상호 주체적인 만남의 행위가 될 수 있다.

WE는 동시대 여러 나라의 예술가들과 블런티어 교육자들이 자신이나 자신의 문화적 정체성을 의미화 하는 과정으로서 서로의 제안과 합의를 이끌어내는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이들이 지닌 창의적 잠재력을 재료로 다양하고 개별화된 가치 지향점들을 생산하기위한 구조를 만들어 나간다. WE는 유연하게 때로는 느슨하게 결속하는 작가 블런티어 교육자들의 네트워크를 통하여 세계화가 이루어 놓은 표준화되고 전체화되는 시각성들에 대해 대안 보완 보충의 시각들을 제시하고 개별화되고 주체적인 예술과 문화 교육 만들기를 그 목적으로 한다.

○ Contemporary Art

동시대 예술 맥락 안에서 논의 되고 있는 다양한 작가와 그들의 의미화 방식에 대한 과정과 태도를 연구한다. 이러한 학습 구조는 급변하는 동시대 예술 패러다임의 내용 파악을 구성원 상호간 개방적으로 점검하면서 작가 자신의 태도와 정체성의 좌표를 그려보는 일련의 행위이며 예술가의 자기 지형을 구축하려는 시도이기도 하다. 또한 분리될 수 없는 공집합인개인 또는 그룹별 프로젝트는 동시대 예술 맥락의 여러 문법과 법칙을 가로지르며 새로운 작업 언어의 개별화된 생산을 통해 무한의 방향으로 확장될 수 있는 platform WE를 목적으로 한다.

○ 문화예술교육 콘텐츠 개발, 컨설팅 및 매개자 교육

개별 프로젝트를 통한 여러 문화예술의 다양한 담론생산을 문화예술교육 콘텐츠로 개발한다. 동시대 예술 전반의 속도감 있는 패러다임 변환을 보다 실효적으로 문화예술교육 현장에 활용할 수 있도록 개별 프로젝트의 과정과 태도 성과의 모든 콘텐츠들을 학제적 의미를 갖춘 교육 철학으로 개발하고 이를 타인과 공유하고 체험할 수 있는 프로그램으로 정착시킨다. 또한 모든 구성원들의 예술적 기질과 태도, 상상력들이 필요한 기관이나 단체들과 네트워크를 구축하고 서로 필요한 재능을 나누는 문화예술교육 컨설팅의 역할을 수행한다.

○ 일반인을 대상으로 하는 동시대 예술 읽기

예술에 대한 생각이 고정되어 있는 일반인들에게 동시대예술이란 도대체가 이해하기 어렵고 복잡하기만 하다. 이는 동시대 예술이 과거 아름다움을 재현하고 기록하는 미술의 사회적 기능에서 벗어나 아름다움의 가치를 재창조 하는 것으로 바꾸어 놓았기 때문이다. 때문에 동시대 예술 속에는 기존의 잘 정돈된 질서와 상식이 파괴되거나 그 의미가 뒤바뀌어 버리는 일들이 자주 발생한다. 동시대 예술은 단순히 시공간에서 독립적으로 예술을 위해서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열려있는 시공간에서 다양한 사회 여러 분야의 맥락에서 존재하기에 동시대 예술을 이해하는 것은 게임하듯 작가들이 작가들의 관찰방식이나 의미화 장치에 의해 설치된 덫이나 함정을 찾아내는 것과 유사하다. 이는 흡사 우리가 외국어를 배울 때 문법을 배우듯이, 동시대예술 작가들의 개개인별 의미화(문법체계)에 대한 기본적이고 빈번하게 인용되고 등장하는 배경과 철학, 태도 등을 알아갈 수 있다면 동시대 예술을 관람하기 또는 이해하고 체험하기가 게임하듯 즐거운 행위가 될 수 있음을 의미한다. 이러한 분류의 동시대 예술 읽기가 절대적으로 읽기의 표본이 되는 것은 아니지만, 동시대 예술의 패러다임은 그 사회를 반영하는 작가들의 개인적 시각성 들과 함께 진보한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일반인을 대상으로 하는 동시대 예술 읽기’에서는 동시대예술을 보다 손쉽고 재미있게 즐기기 위한 장을 마련하고자 한다.

by 크롯 | 2009/05/14 16:24 | 트랙백 | 덧글(0)

예술, 지역, 삶이 소통하는 공간

예술+지역+삶이 소통하는 공간
다원예술공간 매개사업 전국 3곳 2년간 국비 지원
청주는 안덕벌 ‘톡톡’선정돼, 28일 학술세미나 열어
2009년 04월 01일 (수) 09:53:22박소영 기자 parksoyoung@cbinews.co.kr
올해 다원예술 매개 공간 지원 사업에 선정된 곳은 전국에서 세 곳이다. 광주 매개 공간 미나리, 부산 재미난 복수 아지트(AGIT)와 청주 다원예술 매개 공간 톡톡이다. 이들은 문화예술위원회로부터 2년간 1억원의 지원을 받아 다원예술 사업을 펼친다.

아직까지 생소한 용어인 다원예술이란 급변하는 예술 환경에서 삶과 예술의 소통을 중시하며 고정화된 예술장르와 결합을 시도하는 행위 전반을 일컫는다. 여기에 공공예술, 소수자와 이질적인 다문화에 대한 포괄적인 개념을 확장하고 있다. 이른바 독립예술, 비주류 예술에 대한 중요성이 강조되면서 정부가 이들에 대한 지원에 나선 셈이다.
지난 3월 28일 청주문화산업단지 세미나실에서는 다원예술 매개공간에 대한 1차 학술회의가 열렸다. 백기영 커뮤니티 스페이스 리트머스 디렉터가 ‘새로운 문화예술행동과 예술가의 태도’를 주제로 발제를 했다.

  
▲ 지난 28일 다원예술 매개공간에 대한 학술세미나가 열렸다. 사진 왼쪽부터 토론회에서 발제와 토론을 맡은 이종현 청주 톡톡매니저, 백기영 커뮤니티 스페이스 리트머스 디렉터, 광주 미나리의 최윤정 큐레이터, 부산 재미난 복수의 김건우 기획자.
백기영 디렉터는 “다원예술에 대한 정책적인 논쟁거리가 여전히 쌓여있지만, 매개공간이 처음 홍대 앞에서 시작돼 지역으로 확대되는 실험은 바람직하다”며 “이러한 공간이 지역적인 자생력을 확보하는 과제가 남겨져 있다”고 설명했다. 또한 안산의 커뮤니티 공간인 리트머스의 예를 들어, 다문화와 예술의 결합이 낳는 이질적인 요소들을 소개했다.

공간 리트머스가 위치한 안산시 원곡동은 국경없는 마을도 불린다. 원곡동 동사무소에 등록된 전체 등록자 가운데 80%가 이주민이다. 170여개 외국인 상점이 위치한 이곳은 다문화를 삶 가까이 만날 수 있는 동네다. 공간 리트머스는 동시대 언어를 활용한 즉흥적이면서도 자발적인 문화생산을 추구하는 공동체다. 현대미술작가, 미학자, 설치미술작가가 결합돼 처음 공간을 태동시켰다고.

백기영 디렉터는 “기존에 다문화를 바라보는 태도는 불쌍하거나, 두렵거나였다. 리트머스는 그 사이의 시선을 예술로 이야기하는 것이다. 다문화를 잘 융합하는 사회가 발전가능성이 많은 것 아닌가”라고 설명했다.

부산에서 태동한 재미난 복수 아지트는 6년전부터 인디밴드들이 모여 거리 축제를 벌이며 지역민과의 소통을 시도해왔다. 부산대 앞에 위치한 이들은 대학이 상업공간으로 변질되는 것에 반기를 들며 출발했다. 재미난 복수 아지트에는 다국적 예술가들의 레지던스 공간과 갤러리, 인디밴드의 연습실이 공존한다. 이들은 마을잔치및 자취생 영화제 등을 벌이고 있다.

광주의 미나리는 광주 대인시장에 뿌리를 두고 있다. 실제로 작업실을 대인시장에 두고 작업을 한다거나 시장에 작품을 설치하는 방법으로 이미 지난 광주비엔날레에서 스포트라이트를 받았다.

이러한 ‘대인시장 복덕방 프로젝트’는 이후 매개공간 미나리를 운영하기에 이르렀고, 현재 그 성과들이 구체화되고 있다. 마찬가지로 미나리에는 레지던스 작가 25명이 상주해 있고, 자생작가라고 해서 자발적으로 시장에 입주해 작업을 펼치는 이들도 있다. 또한 주말마다 매미(買美)시장을 열어 작품을 판매하고, 지역작가 아카이브, 작가만의 토크쇼 등을 벌인다. 이밖에도 M-art(아트숍), 북카페 등을 운영하고 상시적인 공연을 통해 대인시장에 예술의 향기를 불어넣고 있다.

by 크롯 | 2009/04/22 13:13 | 지역미술정보 | 트랙백 | 덧글(0)

우리가 만든 거대한 상

우리가 만든 거대한 상(像)
신학철展 | 11.21~12.21 | 마로니에 미술관 전관

<한국 현대사-갑돌이와 갑순이>(부분) 캔버스에 유채 2003

“너무나도 천진한 그림을 소개할 수 있게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참으로 오랜 시간 동안 변하질 못했습니다. 노력을 하지 않은 것은 아닌데, 늘 그대로라서 미안합니다.” 민중미술을 지켜온 작가 신학철이 40년의 화업을 돌아보면서 한 말이다. 오랜 시간 작가는 그의 화폭과 싸워왔다.
그가 변하려고 노력했던 것이 무엇이었는지 정확하게 알 수는 없다. 보다 진전된 그만의 예술세계로 나아가고자 했을 것이다. 부단히도 노력했지만 아직도 불만족한 상태에 있다고 고백하는 작가의 말은 매우 진실하게 들린다. 얼마나 많은 민중미술작가들이 90년대 고비를 넘어서면서 서둘러 변하기를 시도했던가? 마치 예술가들이 정치적인 상황의 변화만을 위해 매진해왔던 것처럼 동구가 몰락해 버리자 그들은 미학적 변화를 모색했다. 그때에 변할 수 없었던 신학철과 같은 작가들은 아직도 당시 자신의 작업방식과 주제를 지속해서 고집하고 있다.

한 해에 두 번 세 번의 개인전이 마치 작가의 역량을 증명이라도 하는 것 같이 전시를 난발하는 작가들 속에서 그는 이제 겨우 생애 네 번째 개인전을 연다. 한국미술의 한 유파를 대표하는 작가치고는 그다지 화려한 전시이력으로 보이지 않는다. 그가 변하기를 주저하고 또 변하지 못했기 때문에 얻은 이력이라 생각된다. 이번 전시에는 69년 AG에 가입해서 활동할 당시에 제작했던 오브제 작품들과 설치재현작품들도 볼 수 있다. 그러나 역시 신학철 만의 예술세계가 열리기 시작한 것은 80년대 초부터 시작했던 <한국근대사>연작에서부터이다. 아마도 그 생애에서 가장 큰 변화는 이 시기에 시작되었던 것 같다.

초현실주의적인 사진 몽타쥬 작업과 거기에서 온 회화작업은 아래에서부터 위로 순서대로 진행되는 역사적 사건들을 열거하고 있다. 그에게 있어서 역사는 여러 가지 사건들에 등장하는 사람과 사물들이 뒤엉켜서 만들어낸 괴물과 같다. “난 자꾸 싫은 것만 만나게 돼, 지금도 보면 내가 진짜 좋아하는 것을 그리는 게 아니라 싫어하는 것을 그리게 돼, 그걸 가지고 내가 욕을 해야 하니까”(박찬경과의 인터뷰, 문화과학, 1999,가을호) 라고 말하는 작가는 이 땅의 자본주의가 내쏟고 있는 상품과 욕망의 배설물들을 냉소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이번 전시에 마로니에 미술관 1층 한쪽 벽면을 차지하고 있는 <한국 현대사- 갑돌이와 갑순이>는 길이 20미터 높이 2미터의 대작이다. 이 작품은 거의 10년을 걸쳐서 그린 것이다. 위의 <한국근대사>가 수직적인 구조를 역사적 사건들을 나열하고 있다면, <한국현대사>는 수평적으로 그려진 서민사를 보여주고 있다. 이 그림은 농촌을 버리고 도시로 이주해 산업사회를 건설해야 했던 한국현대사의 서민들의 삶을 표현했다. 이 작품은 연대기적 구분이 없고 파노라마식으로 전개된다. 전체화면은 위 아래로 나뉘는데, 상층부는 서민들을 압도하는 거대한 힘을 상징하는 형상들이 자리 잡고 아래쪽에는 이 힘에 저항하는 서민들의 모습을 보여준다. 이 작품을 통해 작가는 생명력에 가득 찬 민중의 힘을 나타내고 있다. 작가는 민중의 한 사람으로 시대를 살아왔고 또 살아가고 있기에 이 그림은 작가자신의 역사이기도 하다. 나는 오늘 변하지 않는 한 작가의 고독한 투쟁을 배운다. 또한 쉽게 변하지 않는 가치들에 대해서 깊게 고뇌하게 된다.
글_백기영 독일의 현대미술여행 발행인

by 크롯 | 2009/03/01 18:20 | 주요전시 정보 | 트랙백 | 덧글(0)

차기율의 사유의 방

땅의 기억을 찾기 위한 자연에 대한 명상  ‘사유의 방’ 차기율展 | 2003.12.13~12.31 | 창동 미술스튜디오 전시실


흔하게 볼 수 있는 나뭇가지들과 돌멩이들로 이뤄진 차기율의 설치작업 <땅의 기억>은 사뭇 신비스러우며, 일정한 간격들로 늘어서 있는 모습이 제례적인 분위기를 연출한다. 자연의 정령을 간직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이 작품은 나뭇가지나 돌멩이의 형상에 섬세한 관심을 기울이고 있는 작가의 모습을 보여준다. 이러한 조형적인 실험은 같은 제목의 드로잉 작업에서 다시 만날 수 있다. 연필과 콩테로 묘사되어있는 단순해 보이는 나뭇가지들의 선은 획일적이지 않고 자연스럽게 변화하고 있으며, 이러한 변화들은 삼라만상을 변화시키는 자연의 힘을 보여주는 듯하다. 차기율의 드로잉은 완결된 형태로 보이지 않고 계속해서 나열되고 끊임없이 번식하는데, 이것이 그가 땅 혹은 생명에 대한 기억이며 철학이다. 그의 또 다른 작업은 사진작업으로 사진과 금속성 물질, 풀 돌멩이 와 같은 오브제와 합쳐진 형태이다. 이 사진들은 마치 모홀리 나기의 포토그램 실험과 기법상으로 비슷하게 보이는데, 모홀리 나기의 사진이 화학적 물리적 실험의 결과였다면, 차기율의 사진들은 인공물과 자연의 이미지가 만들어 내는 이지적인 대비효과에 주목하게 된다. 차기율이 제목 붙인 <땅의 기억>은 어찌 보면, 인류가 어디로부터 와서 어디로 가는지에 대해 묻고 있는 존재에 대한 기억이고 자신의 탄생과 죽음을 바라보는 관조적 명상이다. 평화스러운 모태이며 인간에게 힘을 부여해 주는 자연은 그에게 있어 단순한 조형물을 넘어 영원에 대한 소망으로 나아간다.  글_백기영 독일의 현대미술여행 발행인, 영상설치 미술가

by 크롯 | 2009/03/01 18:19 | 주요전시 정보 | 트랙백 | 덧글(0)

복화술사의 인형들

복화술사의 인형들
안산아트 메모리 2004 | 6.4~6.13 | 안산시 단원전시관 제3관

하석원 소리 설치, 물, 스피커 장치

단원 김홍도의 고장인 안산에서 현대미술전시가 열렸다. 안산시에서 열린 전시회 치고는 현대미술에 깊이 경도된 작업이 많이 전시되었다. 서울과 지역의 미술현장이 극심한 문화적 차이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인식한다면, 불균형을 극복하기 위해 새로운 미술을 지역미술현장에 보급하는 일보다 더 시급한 일은 없어 보인다. 이러한 일들은 아마도 지역에서 활동하는 미술인들 스스로 자구책을 만들어가지 않으면 안된다.

프랑스에서 유학하고 귀국해서 5년간 안산에 거주하면서 작업하고 활동하고 있는 양정수, 최정미 부부의 기획으로 이루어진 이 전시에는 28명의 작가들이 참여했다. 참여 작가들을 살펴보면, 한국작가들이 주를 이루지만, 캐나다, 벨기에, 이탈리아 등 여러 나라에서 온 작가들도 있다. 이들 외국인 작가들은 한국에서 오랜 기간 체류했거나, 단기간 체류하고 있는 한국에 대해 남다른 정서를 가지고 있는 작가들이다. 이처럼 우리는 쉽게 외국작가들과 함께 전시하고 그들과 우리문화에 대해 이야기 할 수 있는 환경 속에 있는 것이다. 특히, 외국인 노동자 4만 여명이 거주하고 생활한다는 안산에서 복합문화적인 전시의 교류와 개발을 기대하는 것은 너무 이른 것일까? 복합문화도시는 안산이 가지고 있는 지금의 정체성이다. 필자는 근대화와 산업화 과정에서 상실해 버린 도시의 전통과 문화적인 얼굴을 우리나라 지역도시들이 회복해 가기를 간절히 바란다.    

모 회사의 모델하우스를 개조해서 만들었다는 단원미술관은 그 어느 지역의 시립미술관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훌륭했다. 간만에 널찍한 공간에 자리 잡은 작품들을 보는 즐거움은 대도시를 떠나 시원한 평야를 바라보는 기분이다. 서울의 비좁은 갤러리 공간에 닥지닥지 달라붙어 자리싸움을 하고 있는 작품들을 보노라면 때로는 측은한 마음조차 생긴다. 그런데 이런 전시공간이 많은 시간 전시가 없는 상태로 방치되거나 대다수 아마추어 미술인들의 전시로 채워진다는 사실은 매우 안타까운 현실이다.
이 전시에는 공간의 넉넉함을 넘어서 전시 제목에서처럼 “복화술사의 인형들”이 펼치는 작품의 놀이가 아주 재미있었다. 관람자는 여기서 하나의 텍스트로서 작품을 향유하고 또 다른 텍스트를 재  생산해 낸다. 전시공간을 부지런히 회전하며 관람자들의 시선을 유혹하는 정정주나 하석원의 물방울 소리 설치작업, 엑스레이 사진들이 어우러져 만들어내는 정원을 보여준 한기창, 거리를 걷는 한 인물의 등에 매 달린 거울을 따라 흩어지는 도시의 영상을 보여준 이민의 영상작업, 여성의 신체이미지를 회화로 다룬 캐나다 출신 작가 폴 베티츠의 작업, 프란시스 베이컨을 연상시키는 회회작업을 선보인 이탈리아 출신작가 지오반니 피오레토 등이 주목된다.
안산지역의 중요한 미술행사로 축적(메모리)시켜 가겠다는 의지를 보이고 있는 기획자 양정수씨와 함께한 복화술사들, 그리고 그들의 인형들은 정돈되고 완숙한 그들의 축제를 선보였다. 이를 계기로 안산에 새로운 현대미술에 대한 이해의 지평이 더 넓고 깊게 확산해 가기를 기대해 본다.  
글_백기영(영상 설치 작가)

정정주 < Inner Brain> 폐쇄회로 영상장치 120×80×80cm 2003

by 크롯 | 2009/03/01 18:17 | 주요전시 정보 | 트랙백 | 덧글(0)

리차드 해밀턴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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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리차드 해밀턴展 - 백기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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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ichard Hamilton展 7. 12 ~ 11. 9 / 쾰른 루드비히 미술관 (독일)
팝아트 미학의 진수 선보여
글_백기영 독일의 현대미술여행 발행인, 영상설치미술

영국 팝아트의 아버지인 리차드 해밀튼 Richard Hamilton의 회고전이 지난 7월 12일 쾰른 루드비히 미술관에서 열렸다. 이 전시는 11월 9일까지 지속될 예정이다. 바르셀로나 현대미술관Museum of Contemporary Art, Barcelona - MACBA과 루드비히 미술관 Museum Ludwig이 함께 기획한 이번 전시는 50년대 이후로 50년이 넘게 현대미술사를 장식해온 ‘팝아트(Pop-Art)’의 미학을 심도 있게 이해 할 수 있는 리차드 해밀튼의 180여 작품으로 구성되었다.

전시기획자, 디자이너, 교사, 저자 혹은 조형예술가 등등의 분야에 리차드 해밀튼의 흔적이 미치지 않은 곳은 없다. 영국의 팝아트 창시자인 그는 ‘’팝아트는 대중적이고, 풍부하며, 빠르게 잊혀지고, 유머러스하고, 섹시하고 젊습니다.”라고 말한다. 그는 작품을 제작하는데에 사진을 가장 많이 사용하였으며, 대중문화를 끊임없이 논쟁의 대상으로 삼았다. 산업사회의 물건들인 재떨이나 컴퓨터 혹은 전자기계들은 그의 예술에 자주 등장하는 모티브들이다.

리차드 해밀턴 <카라페 Karaffe> 유리 9x20x6cm 1979


올해로 81세가 되는 1922년생 리차드 해밀튼은 런던에서 태어났다. 1934년에 야간학교에서 그림을 배우기 시작한 그는 2년 후에 한 전자회사의 홍보부에서 일하게 된다. 이러한 사회적 경험은 그의 예술에 많은 영향을 끼치게 되는데, 37년부터 일하게 된 리만 스튜디오 Reimann Studio에서의 일이나 38년부터 40년까지 공부하게 된 로얄 아카데미의 미술수업은 그를 전문적인 예술가의 길로 들어서게 해 주었다. 그가 영국 팝아트의 아버지로 자리를 굳힐 수 있게 해준 계기들이 여러 가지 있었으나  그 중에서 가장 큰 영향을 미쳤던 것은 그가 런던의 한 예술공예학교의 타이포그라피와 산업디자인 교사일을 그만두고 만나게 된 니겔 헨더슨 Nigel Henderson에 의해 마르셀 뒤샹 Marcel Duchamp과 아키 톰슨 Arcy Thompson의 ‘성장과 형태에 관해 On Growth and Form’를 알게 된다. 뒤샹에 대한 관심 때문에 뒤샹의 책도 출판하고 66년에는 뒤샹의 전시회를 기획하는 큐레이터로 일 하기도 한다.

리차드 해밀튼이 영국미술계에 두각을 나타내면서 심지어 ‘팝아트’라고 하는 신조어를 만들어 내기까지 하게 된 것은 1956년 작인 <보기, 듣기, 냄새 맡기, 맛보기>라는 작품이 출품되었던
‘이것이 내일이다! This is tomorrow’ 전시를 통해서였다.

한 인물의 이마에는 ”think, think, think”라고 씌여진 글자가 만화의 말묶음 상자 안에 들어 있고, 눈에는 화살표 안에 “ look”이라는 단어가 그리고 코에는 ”smell” 귀에는 “listen” 볼에 ”feel”이 입에는 물음표만이 가득차 있는 말묶음 상자들이 그려진 그림이다. 당시 대중만화와 포스터에 관심을 가지게 된  예술가들의 작품으로는 이것이 처음이었다. 이 작품을 통해 그는 지각하는 것과 감정이 그 어떤 것보다 중요하는 것을 말하고 있다. 이 작품은 본래 설치 작품인 < Fun-Hous >의 한 부분이었는데, 런던의 화이트 채플 갤러리에 설치되어 있었다. 이 전시에 영국의 팝아트 미술사를 기록한 꼴라쥬 작업인 <오늘날의 가정을 이처럼 다르게, 흥미진진하게 만드는 것은 무엇인가?>가 함께 출품되었다.  

마르셀 뒤샹은 그의 예술가 생애에 있어서 스승이자 모범이었다. 그렇지만 마르셀 뒤샹과 그는 많이 다르다. 그는 대중문화를  독자적인 현대미술로 전환시킨 선구자이다. 이번 전시를 통해 그는 다음과 같이 회고한다. “내가 만든 작품들은 돌아보면 항상 이론적이었다. 그리고 분석적이었다. 나는 이것을 나와 함께 팝아트에 귀속되려고 하는 작가들처럼 보지는 않는다. 나는 이 ‘팝Pop’이라는 말을 ‘상품 Product’과 구분해서 사용한다. 그러나 나의 재떨이들은 상업적이고 산업적인 예술로부터 나온 것이다.” (쿨투어 벨트 슈피겔과의 인터뷰, 2003년 7월 27일자) 이제 너무도 많은 일을 그의 생애를 통해서 해야 했던 한 작가의 회고전을 통해서 벅찬 감격으로 그의 개인사와 미술사를 돌아보는 일만 남았다.

by 크롯 | 2009/03/01 18:13 | 주요전시 정보 | 트랙백 | 덧글(0)

백기영과 임흥순 전 : 기억과 기록 사이에서 다시 쓰여지는 역사

리뷰&칼럼
<백기영 전>과<임흥순 전>- 기억과 기록 사이에서 다시 쓰여지는 역사
2004-01-09 오후 5:46:30        
임흥순, <추억록>부분, 투 채널 비디오 영상, 2003
▲ 임흥순, <추억록>부분, 투 채널 비디오 영상, 2003

박수진 미술평론가

●● 기억의 사전적 의미가 지난 일을 잊지 않고 외워 둠, 또는 그 내용이라는 점에서 기억은 어떤 사건이나 기표가 상징적 기억 속에 제일 처음 등록되는 행위이다. 하지만 그 기억은 시간이 지나가면서 어느 것은 지워지고 또 어느 것은 더욱 또렷하게 두드러진다. 즉 기억은 망각과 같이 공존하는 것이며 그렇기 때문에 다시 그 기억을 끄집어낼 때는 경험적인 체험 안에서 과거의 생생한 사건을 되새기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과거를 재구성하게 된다.

또한 사람들은 하나의 사건이나 느낌이 기억 속에서 망각되는 것을 피하기 위해 사진으로, 일기로, 또는 다른 어떤 것으로 기록하지만 그 기록을 통해 복원된 기억 역시 시간이 흐르면서 다시 읽히게 된다. 즉 현재가 과거에 영향을 미치는 것이다. 결국 자신의 기억을 상기하는 것은 기억의 문제라기보다는 자신의 과거를 ‘다시 쓰는’ 문제이다.

《추억록 - 임흥순 영상전》(7월 4일∼7월 22일, 일주아트하우스), 《인간적인 정원 - 백기영 영상전》(7월 9일∼7월 19일, 조흥갤러리) 이 두 전시는 개인의 기억을 기록하고 있다는 점에서 또 기억을 다시 복원하고 있다는 점에서 동일한 주제 위에 있지만 그 복원은 다른 방식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먼저 임흥순의 추억록은 부모의 사진첩과 가족사진을 찍는 과정을 담아낸 비디오를 투 채널로 영사하는 멀티 프로젝션 방식의 작품이다. 그는 동시에 보여지는 한쪽 화면에는 자신의 부모 사진첩 속의 기념사진들을 통해 개인의 과거를 한국 근현대사 위에 중첩시키고, 다른 한 화면에는 자신의 가족사진을 찍으러 간 스튜디오의 풍경과 그 촬영 과정을 담은 비디오 작업을 동시에 보여준다. 이 과거 기록을 통한 기억의 상기와 현재의 삶을 기억하기 위한 기록을 동시에 병치시킴으로써, 작가는 과거의 기억과 현재의 기록을 서로 충돌시키고 개인 삶의 역사를 은유적으로 재구성하면서 또 개인의 역사를 사회화시킨다.

여기서 우리가 관심을 가지는 것은 실제로 일어난 과거의 사건이 아니라 이러한 사건들이 현재의 기억 속에 존재하는 방식이다. 지금 다시 보는 어머니, 아버지의 기념사진들은 각인된 개인의 기억을 끄집어내는 것이지만 그것을 통해 지나간 시대가 가지는 사회적 모순 또한 같이 기록되어 있다. 기억을 통해 복원된 개인의 역사는 완전히 재구성되어 있다. 그리고 개인 삶의 기록을 통해 복원된 기억은 개인의 역사만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다. 즉 기념사진이라는 개인의 기록은 더 이상 개인의 기억에만 머무는 것이 아니라 사회의 무의식으로 확장되어지며 과거의 역사로 재구성되어 복원된다.

반면에 백기영은 고향을 잃고 뿔뿔이 흩어져 살아가는 사람들의 고단한 삶을 정원 프로젝트를 통해 보여주고 있다. 그의 정원 프로젝트는 먼 이국 땅인 독일에 뿌려진 한국씨앗의 성장과정을 기록함으로써 개인의 과거와 지나간 우리 역사를 은유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백기영, <정원-이주 프로젝트 : 3개월 간의 정원예술 프로젝트>, 기록사진 몽타주, 2002
비디오 작업인 <비오는 정원>은 70년대 광부로 독일로 건너가 독일에서 삶의 터전을 만들면서 살고 있는 재독 한국인의 삶에 관심을 가지고 제작한 작품이다. 작가는 독일에 정착한 한국인 광부의 삶을 독일 땅에 정착한 식물들을 통해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광부는 정원 가꾸기를 통해 오랜 세월 동안 잃어버린 자신의 고향을 독일의 광산촌에 재창조하고자 한 것이다.

또한 <독일 뮌스터 작은 정원 예술가 협회 30번지에 위치한 베른트 하이데 할머니의 정원에 파종된 22종의 한국 씨앗의 정장과정을 기록한 프로젝트>는 잡초를 제거하지 않은 채로 씨앗을 뿌리고 최소한의 생존조건만을 갖추어 주고 파종된 한국식물들이 독일 땅에 정착하는 모습을 사진과 영상작업으로 진솔하게 기록하여 보여주고 있다.

전시장에서 보여지는 사진은 작가가 정원의 다양한 빛깔의 꽃들과 낮은 덤불들, 나무들 사이를 배회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정돈되지 않은 정원의 모습은 서로 뒤얽혀 있는 식물들이 서로 조화를 이루며 인위적이지 않은 자유로운 평화를 보여준다. 자연스럽게 자란 식물들 중 어느 것이 다른 곳으로부터 이주하여 낯선 곳에 정착한 이방인이라고 배척되지 않고 도드라져 보이지도 않는다.

어쩌면 그것은 이방인들이 꿈꾸는 유토피아가 아닐까. 이런 점에서 독일의 땅에 정착한 늙은 광부가 잊었던 고향, 잃어버린 어린 시절, 낯선 상황 안에서 잊고 살았던 자기 정체성을 다시 찾고자 새롭게 만드는 고향이 바로 이 정원일 것이다. 그리고 그는 그 안에서 자신의 상처받은 영혼과 과거를 치료한다. 그는 기억을 그리움으로 대신하고 그 간극을 향수로 채울 것이다. 한 인간이 자신의 뿌리에서 뽑혀 던져질 수밖에 없었던 아팠던 기억일지라도 기억 안에 자리잡고 있는 잃어버린 고향은 그리움으로 복원된다. 그리고 그것은 한 인간의 개인사를 넘어 우리 이민의 슬픈 역사가 새롭게 쓰여지고 있음을 보여준다.

정원 프로젝트를 통해 백기영은 식물의 이주 기록에 투영한 개인의 역사와 그를 통해 복원되는 한국사회의 역사를 보여주는 것을 넘어 현재 사회가 이주와 이민으로 혼성적인 사회를 형성하는 “디아스포라 Diaspora”라는 것 또한 보여주고 있다. 새롭게 정착된 식물들의 기록과 그 정원은 미래의 과거, 기억이 될 현재의 기록들이다.

이 두 전시는 개인의 삶을 기록을 통해 기억해 내면서 그 너머에 있는 것을 표현하고자 했다. 그것은 개인을 넘어선 우리 사회의 무의식이며 다시 쓰여진 우리의 역사이다. 그런 점에서 ‘역사’는 단순히 과거 사건들의 순서가 아니라 ‘과거에 대한 현재의 통합’이라는 것을 분명히 알 수 있다. 즉 역사는 과거가 아니다. 역사는 과거가 현재 속에서 역사화되는 한에 있어서 과거인 것이다. ⊙

by 크롯 | 2009/03/01 18:11 | 주요전시 정보 | 트랙백 | 덧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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